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파란만장한 삶의 족적과 큰 예술적 업적을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고인은 29일 오후 8시쯤(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아파트에서 부인 구보타 시게코(69)가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고인은 1932년 7월 20일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부유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예술을 전공하면서 미술계에 발을 내디딘다. 고인은 TV에 예술을 입히며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를 창시해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더불어 20세기 현대미술의 양대 승리로 일컬어진다.

누구나 백남준의 이름을 들어보았고 미술사 책에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그도 고국으로부터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한국의 평론가들로부터는 “백남준의 작품은 어린애 장난이지 예술 작품이 아니다” “민족이 불행을 겪는 동안에 외국에서 편안한 도피 생활을 한 반동적 부르주아”라는 비난을 들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로 불린 고인은 한국의 명성을 세계에 떨쳤으면서도 조국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한국을 선전하는 길은 내가 잘되면 저절로 이뤄진다. 한국에서는 말을 앞세우는 국수적인 애국자가 늘 이기는 것 같다”고 말해왔다.

미국 뉴욕과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고인은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고 당뇨와 백내장 등을 앓으면서도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 독일비디오 조각전(19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40년 회고전(미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박물관 2000) 등을 열었다. 이 밖에 2000년 1월 새천년을 맞이해 제작한 생방송 프로그램 ‘호랑이는 살아 있다’, 2000년 2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7월 서울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전시된 ‘백남준의 세계’를 통해 예술적 성취와 미술사적 위상을 재차 확인시켰다. 2004년에는 옆사람 모자에 물감을 칠하고 피아노를 밀어버리는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을 펼치기도 했다.

96년 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에 뽑혔고, 97년 독일 ‘카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98년에 교토상, 2000년에는 금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스스로 말했듯이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고인의 곁에는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그의 작품세계를 밀어주는 일본인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있었다. 구보타 역시 비디오 예술가다.

고인과 구보타의 만남은 63년 도쿄에서 열린 백남준의 공연장에서 이뤄졌다. 전위예술에서 당시 꽤 앞서가던 일본 예술가들에게도 백남준의 공연은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미 이름난 예술가로서 공연장에서 고인을 처음 본 순간 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는 구보타는 오랫동안 백남준을 쫓아다니며 눈물겨운 구애를 벌였다. “난 예술가니까 자유로워야 한다”던 고인이 그녀에게 항복한 것은 77년.

하지만 비디오 예술가로서 백남준과 구보타는 예술세계에서만큼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각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들킬까 봐 서로의 작업실을 감추고 조수도 따로 썼을 정도. 그러던 구보타는 1996년 고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회복을 위해 헌신한다.

공동 작업 파트너였던 그녀는 백남준의 치료 과정을 ‘섹슈얼 힐링(sexual healing)’이라는 코믹한 비디오 작업으로 남기기도 했다. 구보타는 “백남준을 오래 살게 하는 것이 내 일생에 마지막 할 일”이라고 말했다. 백씨 장례식은 뉴욕 맨해튼 메디슨 애비뉴의 프랭크 켐벨 장례식장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비디오 아트'' 명성 얻기까지

TV를 새로운 예술 소재로 이용한 ‘비디오 아트’를 20세기에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피카소나 뒤샹의 작업 못지않은 업적이라고 자부했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 그는 기계의 정신성 회복을 화두로 삼았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대변한다. 세계적 명성을 얻으면서도 국내에는 기행을 일삼는 전위예술가 정도로 알려졌던 고인이 국내에서도 천재적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심은 것은 전 세계에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서다. 1984년 초 파리와 뉴욕, 베를린, 서울을 통신위성으로 연결하는 TV 방영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만들면서 “원래 예술이란 게 반은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고 일갈해 ‘무엇을 근거로 예술이 사기인가’라는 논란과 함께 국내 문화예술계에 파란을 불러왔다.

당시 백남준은 “TV는 인간을 폭압하는 수단이라고 말한 조지 오웰에 대해 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반대했다. 1984년에 오웰이 틀렸다고 한 사람은 비디오 아티스트인 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은 뉴욕과 파리에서 동시 진행된 공연으로 로리 앤더슨, 이브 몽탕과 같은 팝스타와 존 케이지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패션 디자이너, 코미디언 등이 출연했으며, 위성을 통해 세계 대도시들로 생중계 됐다. 쌈지스페이스 김홍희 관장은 이 작품에 대해 “삶과 같이 일회적이고 생생한 이러한 생방송이야말로 백남준이 추구하는 참여 텔레비전의 이상적 모델”이라며 “텔레비전이 독재자의 명령을 하달하는 정치적인 도구로 기능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예언을 부정한 것”이라고 평했다.

경기중·고를 다닌 백남준은 고교 시절에 현대 음악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매혹돼 일본 도쿄대학에서 음악사(쇤베르크)를 전공했고,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음악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유럽 전통음악의 한계를 깨닫고 방황하던 그는 미국인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난 뒤 예술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게 된다.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가진 생애 첫 개인전에서 고인은 유명해진다. ‘장치된 비디오’ 3대와 ‘장치된 TV’ 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 머리가 전시됐다. 이전에 백남준을 지켜봤던 ‘플럭서스’(전통을 파기하고 예술과 삶의 접목을 시도한 급진적 미술운동) 운동의 창시자 요셉 보이즈가 난데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중인 피아노 한 대를 부숴버린 것. 이는 그의 비디오 아트의 개척을 알리는 동시에 기행으로도 유명해진 계기였다.

이후 1965년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74년 ‘TV부처’, 76년 ‘TV 로댕’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TV부처’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은 백씨가 ‘TV 시계’(1963)와 함께 자신의 대표적으로 꼽는 작품이다. ‘TV 부처’는 TV를 쳐다보고 있는 부처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백씨는 이 작품으로 일약 세계 미술시장의 스타가 됐다. 12개의 모니터에 초생달에서 보름달까지 담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과 24개의 모니터를 사용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텔레비전 시계’는 시간의 상징인 달과 시계를 통해 순간과 영혼은 동일하다는 시간 개념을 표현한 작품이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기념해 선보인 ‘바이바이 키플링’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만들어진 ‘손에 손 잡고’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맥을 잇는 작품이다. ‘손에 손 잡고’의 경우 한국을 비롯해 이스라엘, 브라질, 서독, 중국, 이탈리아, 옛 소련, 일본 등 10여개 국가가 함께 참여한 범세계적인 작품으로, TV를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장벽을 초월해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에는 1003개의 수상기로 만든 탑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 ‘다다익선’이 설치됐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씨는 그 후에도 98년 경주 엑스포에 ‘백팔번뇌’, 2000년 미국 뉴욕에서, DMZ 프로젝트 ‘호랑이는 살아있다’를 선보이는 등 작품 활동을 계속해 왔다. 엄형준 기자 ting@segye.com

백남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