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얘긴데 제가 그동안 살아오며 이 일을 반추할 때마다 살이 붙어서인지 적어놓으니 아주 길어지네요.
전체적인 팩트는 100% 실화에요.

제가 초등학교 4? 5? 학년(삼십년전 얘기라 가물가물..)이 되던 여름 방학때 집안끼리 친하고 단짝이던 수영이네 외가댁에 이 주 정도 놀러간 적이 있어요.

그 유명하다는 화개장터 부근, 산마루 끄트머리에 자그맣게 위치한 동네였는데요. 앞으론 큰 개울을 따라 작은 밭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어있고 뒤로는 울창한 숲이 산자락을 따라 내려와있어서 그림같이 아름다웠던 기억이 나요. 외부유출 인구가 많아서 빈 집도 많고 점점 작아지고 있는 한적한 마을이었지요.

낮에는 차가운 시냇물에 발 담그고 송사리잡고 아무 오두막에 올라가 늘어지게 자다가 새참을 드시던 어르신들이 불러 쥐어주시던 감자나 고구마로 배를 채우고 밤에는 모깃불 주위에 둘러앉아 한가롭게 부채질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어린 저에게는 달콤한 추억의 한자락으로 기억될 뻔 했던.. 그 해의 여름.

어느 저녁날,  감자며 옥수수에 물려버린 우리는 문명의 스낵을 사먹겠다는 일념으로 이미 어둑해진 밤길을 나섰어요.

마을에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담배도 팔고 버스표도 팔고 하는 작은 점방이 있었는데요. 산 어귀 깊숙히에 자리잡은 수영이네 집에서 점방과는 거리가 꽤 있었죠. 이미 닫혀버린 점방 문을 한참을 두드려 자다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그 집 아들네미에게 새콤달콤을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논둑을 걸으며 발견하는 빈 집들은 어둠이 깔리고나니 낮과는 달리 굉장히 흉물스러웠어요. 낮에는 보물찾기며 숨바꼭질을 하느라 신나게 헤집고 다녔는데 말이죠. 왼쪽으로 산 비탈을 따라 오래된 한옥들이 띄엄띄엄 들어서있고 오른쪽으로는 논 밭이 펼쳐진 지형이었어요. 밭의 수면에 비친 달빛으로 오른쪽은 밝았지만 왼쪽은 산 그늘에 가려진데다 깜깜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안 될 정도였어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 밤에도 불을 켜고 잠이 드는 수영이는 이미 겁을 잔뜩 먹었는지 평소보다 재잘재잘 말이 많았어요. 반쯤은 뛰듯이 걷던 수영이가 갑자기 흡하고 숨을 들이마신채 눈이 동그래졌어요.
"수영아, 왜 그래?"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한 곳을 응시하던 수영이의 시선 끝에는 꽤 규모가 큰 한옥집의 담벼락이 있었어요.

"저기 저 여자..."
수영이가 간신히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눈으로 한참 더듬어보니 여자 얼굴같은 게 보이더라고요. 왜 어릴때는 구름을 보고도 저건 사람 얼굴, 주전자 모양, 이래가며 놀잖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확실치는 않은데 사람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사람 얼굴로 보이는 느낌요. 검은 머리를 사발한 채 얼굴이 희고 둥근 모양이었어요. 혼자였으면 기겁했겠지만 저도 모르게 수영이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버럭 큰 소리를 질렀어요.

"누구세요? 저흰 그냥 여길 지나가는 거에요!"

라는둥 우리는 심부름을 나왔다는둥 주절주절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면서 수영이를 부둥켜안고 그 집앞을 간신히 지나왔어요. 일부러 무섭지 않은채 했지만 수영이네 집이 가까워졌을 때는 후들거렸던 다리에 힘도 들어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막 뛰어들어갔네요. 그때는 '우리가 실제로 귀신을 경험했다'라고 믿고싶은 어린 호기심과 더불어 어떤 영웅심같은 게 생겨서 아주 겁을 먹진 않았어요.

우리가 시골집을 떠나올 무렵 수영이의 사촌오빠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이었는지 아무튼 저희보다 나이가 많아서 어른처럼 느껴지는...)가 내려왔어요. 수영이는 드디어 얘기를 풀어놓을 마땅한 상대를 만났다고 여겼는지 신나게 영웅담을 펼쳤어요.

다음은 사촌오빠의 얘기입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그 고래등같이 큰 집의 주인은 이 마을의 지주였답니다. 그런데 그 집 딸이 혼전임신을 하는 바람에 목을 메고 자살을 했다는군요. 크게 노한 지주 양반은 소문이 퍼지는 것이 두려워 딸의 시체를 거두지않고 마당 한가운데 있는 우물에 던져버리고 우물을 못 쓰도록 막아버렸다네요. 여기까지 들은 수영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는데 오빠가 겁을 준 것이 미안했는지 괜찮다고 토닥였어요.
"아무리 귀신이라도 그 담벼락위론 못 올라가니까 걱정마."

이 마을의 특징이 담이 야트막하거나 없는 것인데요. 딸의 일이 있고나서 지주는 담을 아주 높게 쌓아올렸고 누구도 그 집 마당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해요.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2미터가 넘는 그 높은 곳엘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니 수영이가 본 것은 귀신도, 사람도 아닌 담장 밖으로 흐드러진 나무줄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오빠가 추측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빠의 위로가 좀 갸우뚱한데 어렸던 저희는 귀신이 허공에 뜰 수 있단 생각은 못 했나봐요.
수영이는 자신의 경험한 귀신이 가짜라고 판명이 나서 그런건지 아니면 오빠의 덧붙인 얘기에 겁을 먹어서인지 아무튼 잔뜩 화가나서 오빠에게 마지막 인사도 않고 떠나왔죠.

그런데 이 얘기가 왜 무섭냐면요.

저는 수영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영이의 한 마디를 기억하거든요. 밤길이 무서워 쉴새없이 떠들던 수영이는 정작 그 여자를 본 후로 입을 다물었고 제가 수영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해 큰 소리를 질러대던 그 때요. 눈도 깜빡이지않고 발 밑을 응시하며 수영이가 했던 한 마디를 저는 잊지못해요.

"저 여자는 왜 저런 데서 머리를 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