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낮 1시 서울 광진구의 한 주택가. 권모(24)씨가 집 근처에 세워둔 BMW 차량 왼쪽 측면에 무언가에 길게 긁힌 자국이 1m가량 나 있었다. 블랙박스 영상에는 한 할머니가 폐지가 담긴 리어카로 차 뒤범퍼를 한 차례 받은 뒤 방향을 틀어 차 왼쪽으로 지나가는 장면이 녹화돼 있었다. 권씨는 수십분간 인근을 수색해 영상 속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 A(75)씨를 발견했다.

A씨는 손에 목장갑을 끼고 검정 트레이닝 바지에 털모자를 쓴 허름한 차림새였다. 이 할머니는 처음에 "내가 흠집을 내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하자 태도를 바꿔 "폐지를 줍고 살아 살림이 어렵고, 가족도 없이 강아지와 혼자 살고 있어 배상할 형편이 아니다"고 말했다. 권씨는 측은한 마음에 수리비 200만원가량을 자기 돈으로 부담하겠다며 A씨를 보내줬다. "노인이 추운 날씨에 폐지를 줍고 있어 누가 봐도 딱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저녁 외출했다가 돌아오던 권씨가 집 옆에 있는 5층짜리 빌라 건물 앞에서 리어카를 다시 발견했다. 미심쩍게 여긴 권씨가 이웃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놀랍게도 할머니가 시가 10억원 상당인 이 건물의 주인이었다. A씨는 2003년 건물을 구입해 3년 전 재건축했고, 건물에 담보 설정도 돼 있지 않았다. 이웃들은 "할머니가 검소하지만 형편이 어렵지는 않다"고 했다.


권씨는 '속았다'는 생각에 경찰과 함께 이 건물 2층에 사는 A씨를 방문했다. 그러나 A씨는 "수리비를 줄 수 없다"며 버텼다고 한다. 권씨가 광진경찰서에 사건을 신고하자 A씨의 아들이 나타나 20만원을 합의금으로 내놨다. 권씨는 "합의는 했지만 나보다 재산이 많으신 분이 정당한 배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황당했다"고 말했다. A씨는 "건물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 번 7000~8000원으로 생활하고, 은행 빚도 있어 사정이 좋은 건 아니다"고 말했다.